[국내] 영등포 뒷골목 누비는 ‘나이팅게일’ … 삭막한 겨울 쪽방촌이 따뜻해졌다 2017-12-28


서울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 6번 출구 뒷골목은 번화한 주변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500여 개의 쪽방이 밀집해 ‘영등포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이다. 영등포 쪽방촌상담소의 간호사 신인숙(52)씨는 쪽방들 사이로 난 미로 같은 골목길을 매일 누비며 주민들을 만난다.

지난 20일 오후 5시 신씨가 몸을 한껏 웅크리며 한 쪽방의 문을 열었다. 좁고 높은 계단이 옥탑으로 이어졌다. 까치발을 하고 계단에 올라서자 옥탑 쪽방에 사는 김주명(65·가명)씨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환기를 못해 미안합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수년간 간경변증(간염 바이러스, 과음 등으로 간세포가 섬유화하는 병)을 앓은 김씨가 신씨를 맞았다. 3.3㎡ 남짓한 방은 김씨가 다리를 펴고 누우면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전기매트가 놓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낡고 녹슨 세간살이가 들어차 있어 문도 활짝 열리지 않았다.

“혈압약 먹었어요? 밥은?” 신씨가 ‘잔소리’를 하며 방 한구석에 있던 약통을 눈에 잘 띄는 TV 위에 올렸다. 이어 이불 밑으로 드러난 김씨의 새까만 발을 만졌다. 발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사이에 덕지덕지 피가 고여 있었다. “바셀린 가져다 드릴 테니 바르고 양말로 싸매고 있어요”라고 처방을 했다.

신씨는 올해 2월 서울시가 처음으로 도입한 쪽방촌 전담간호사 6명 중 한 명이다. 지병을 달고 사는 주민들에겐 ‘쪽방촌 나이팅게일’이다. 10개월째 ‘병원 회진하듯’ 영등포 쪽방촌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게 연말은 더 바쁘다. 신씨는 “추위 때문에 혈관이 수축해 혈압이 오르거나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아 관절 질환이 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 번 돌아보던 곳도 두 번 이상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자와 중증장애인 등 주요 보호 대상자 20~30명을 매일 찾아간다. 2시간 정도 걸리는 일인데 건강 상담 외에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4~5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쪽방촌 전담간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보건소 소속의 계약직 간호사가 이 일을 했다. 간호사 업계에서도 기피하는 근무지였다. 2~3개월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민들과의 관계도 데면데면했다. 당연히 건강 상태에 대한 데이터도 잘 쌓이지 않았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인 신씨가 이곳에 오면서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중증 알코올 중독인 한 거주자를 ‘제 발로’ 병원에 보낸 ‘사건’이 대표적이다. 구급차가 출동할 때마다 난동을 부려 119에서조차 꺼리던 그를 신씨는 3개월간 매일 상담했다. 밤낮으로 전화도 걸었다. 결국 그로부터 “잔소리 듣기 귀찮아서 병원에 간다”는 항복을 받아냈다. 신씨는 “가장 보람찼던 순간”이라며 웃었다.

민간 종합병원 수술실과 응급실에서 10년 정도 일한 뒤 치매 노인 시설과 노숙인 보호센터 등에서 일했던 신씨는 “쪽방촌을 돌보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신씨에게도 편견이 있었다. 폭력적이거나 게으른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속사정을 알고 보니 누구나 나락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사업 실패와 가족과의 단절, 고령화와 질병, 정신 질환 등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신씨는 “‘왜’라는 생각보다는 ‘오죽하면’이란 마음으로 쪽방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의 5개 쪽방촌(영등포·돈의동·창신동·남대문·서울역)에는 3274명의 도시 빈민이 사는 것으로 집계된다. 대부분이 중증 장애나 질환을 앓고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신씨는 “간호사 전담제가 더 알려져 쪽방촌 사람들에게 더 많은 봉사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고 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 중앙일보